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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니치니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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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1872년 창간된 일본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정부의 홍보지 역할을 수행하며 자유민권운동 시기에는 어용 신문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경영권 변동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의 합병을 거쳐 1943년 마이니치 신문으로 제호가 통일되었다. 1948년 석간으로 부활했으나, 1955년 폐간되었다. 전일본바둑선수권대회, 명인전 (장기) 등 다양한 사업을 주최했으며, 중일 전쟁 당시 백인 살해 경쟁 보도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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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니치니치 신문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문 이름도쿄 니치니치 신문
원어 이름東京日日新聞
로마자 표기Tōkyō Nichi Nichi Shinbun
유형일간지
크기브로드시트
창간일1872년 2월 21일
폐간일1955년 8월 31일
후신매일신문
전신강호신문 (1868년 5월 - 1868년 7월)
태정관일지 (1868년 - 1877년 1월 18일)
매일전보 (1906년 - 1911년)
시사신보 (1882년 3월 1일 - 1936년 2월 24일)
사업자(일보사 →)
(주식회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도쿄 지점 →)
(주식회사 마이니치 신문사 (초대) →)
(주식회사 민보사 →)
(주식회사 도쿄 니치니치 신문사 →)
주식회사 마이니치 신문사 (초대)
(현재의 주식회사 매일신문사 (3대) 도쿄 본사)
본사 위치(도쿄부 아사쿠사 카야초 1-24)
(도쿄부 니혼바시 모토오사카초 신도)
(도쿄부 아사쿠사 가와라마치 16번지)
(도쿄부 도쿄시교바시구오와리초 1-1)
도쿄시 고지마치구유라쿠초 1-2
회사 정보
기타 정보
도쿄 니치니치 신문사의 사옥 (1933년)

2. 역사

2. 1. 도쿄 최초의 근대 신문 탄생

메이지 5년 2월 21일(양력 1872년 3월 29일)에 극작가 조야 덴페이, 서점 점원이었던 니시다 덴스케, 우키요에 화가 오치아이 이키지로에 의해 도쿄 최초의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었다. 조야, 니시다 그리고 나중에 입사한 후쿠치 겐이치로는 왕정복고 직후인 게이오 4년(1868년)에도 에도에서 '''『강호신문』'''이라는 격일간 신문을 발행했지만, 겨우 22호 만에 폐간되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처음에는 아사쿠사 카야마치(현재의 다이토구。JR 소부선 아사쿠사바시역 근처)에 있던 조야의 자택에서 발행되었지만, 2년 후인 1874년(메이지 7년), 긴자(현재의 주오구)에 사옥을 짓고 진출했다. 잡보가 들어간 「신문 니시키에」가 도쿄 기념품으로 화제를 불렀다. 1873년(메이지 6년)에 호키야마 케이유와 키시다 긴코가 입사했고, 평이한 구어체의 잡보 란이 인기를 얻어 대중지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신문지 발행 조항 제정에 따라 태정관(현재의 내각)으로부터 발행 허가를 받았다.

1874년(메이지 7년) 12월 2일, 후쿠치 겐이치로가 입사와 함께 주필에 취임하여 사설란을 창설하고,부터는 지면을 일신했다. 정부를 옹호하는 논조를 펼치는 어용 신문이 되어 자유민권파의 정론 신문과 대항했다. 이때 교정 주임으로 초빙된 사람은, 언어학자로 후쿠치와 함께 유럽 파견 사절단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이치카와 세이류였다.

1876년(메이지 9년), 도쿄 긴자 오와리마치의 에비스야 고후쿠텐이 도산한 터를 취득하여 이전했다. 이후 유라쿠초로 이전할 때까지 본사로 사용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미쓰이물산이 창간한 중외물가신보(현재의 일본경제신문)의 인쇄를 수주했다.

2. 2. 정부 홍보지의 역할

1877년(메이지 10년),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정원 문서국과 간행물 『태정관일지』를 폐지했다. 이후 수년간,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태정관 기사 인행 고용"을 표방하여, 본지의 "태정관 기사", "홍보"란이 메이지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대행하는 상태가 되었다.[3] 다만, 공식적인 법령 공포 기능은 없었고, 태정관직은 별도로 문서를 배포하고 있었다.

1880년(메이지 13년) 무렵부터 정부 비판의 고조와 함께 "어용신문"이라는 비판도 강해졌지만, 그 후 1883년(메이지 16년), 태정관 아래에 다시 문서국이 설치되어 관보의 간행을 시작했다. 1885년(메이지 18년),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포고·달(포달)은 관보 게재를 가지고 공식으로 하고 별도로 배포하지 않는다」'''는 포고(현재의 정령 또는 통달)를 내리고, 이후 민간 상업 신문이 메이지 정부의 공식 발표를 대행하는 일은 없어졌다.

2. 3. 경영권 변동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의 합병

자유민권운동 시기에, 후쿠치 게니치로는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는 입헌군주제정당 결성에 참여했으나, 정부 고관들의 초연주의적인 입장으로 인해 곧 와해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조노가 중심이 되어 자매지 『경찰신보』가 창간되었고, 2년 후 1886년(메이지 19년)에 '''『야마토 신문』'''으로 개제되었다. 도니치는 대신문으로, 야마토는 소신문으로 각각 발전했다.

1888년(메이지 21년), 사장 교체를 계기로 중립 노선으로 전환하여 부수를 늘렸지만, 1891년(메이지 24년)에 장주번 벌의 기관지가 되어 다시 정부 편이 되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 미쓰이 재벌의 지원을 받았고, 1904년(메이지 37년)에는 미쓰비시 재벌에 의해 매수되었다. 가토 다카아키가 사장에 취임했지만 경영 부진은 해소되지 않았고, 1911년(메이지 44년)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분: 대매)의 사장 혼야마 히코이치에게 매각되었다.

대매는 메이지 초기에는 정치적 색채가 강해 경영이 부진했지만, 1889년(메이지 22년)부터 온건한 논조로 전환하여 광고 수입이 증가하면서 『오사카 아사히 신문』(현재의 아사히 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킨키 지방의 유력지가 되었다. 1906년(메이지 39년), 경쟁지인 전보신문을 매수하여 『매일전보』로 개제하고 도쿄로 진출했다. 혼야마는 매일전보를 도니치와 합병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을 타지보다 먼저 보도했고, 러시아 혁명 보도와 레닌과의 면담으로도 주목받았다. 시베리아 출병에는 신중론을 취했고, 국내 문제에서는 미소동란 등의 사회 문제도 다루었으며, 보통선거운동에도 찬성 입장을 취했지만, 유사한 논조를 취하는 아사히 신문(도쿄 아사히·오사카 아사히)과 전국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양사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2. 4. 전국지 『마이니치 신문』으로

1943년 1월 1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신문 통제에 의해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분)으로 통일했다. 편집 기능은 도쿄에 통합되었다. 메이지 초기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도쿄 니치니치 신문"이라는 제호는 이때 사라졌다.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도 후에 『마이니치 신문』,『도쿄 마이니치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은 무사시국구라키군요코하마정(현재의 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나카구)에서 창업한 '''요코하마 활판사'''가 원조이며, 도쿄니치니치 신문의 계보와는 무관하다.

2. 5. 석간 도쿄 니치니치 신문

1948년 12월 4일,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 계열사인 도쿄니치니치 신문사(東京日日新聞社)에 의해 새로운 석간 신문으로 "도쿄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이 복간되었다(제호는 부활했지만, 호수는 1호부터 새로 시작했다).[11] 복간(신창간)의 배경에는 종전 직후 용지 통제가 기존 신문보다 신흥 신문에 더 많이 할당된 점이 작용했다. 당시 민보사(民報社)에서 발행하던 "도쿄 민보(東京民報)"는 스즈키 이쿠조(鈴木郁三)를 거쳐 마이니치 신문사와 손을 잡게 되었고, 1948년 11월 30일 폐간된 후 민보사가 도쿄니치니치 신문사로 개칭, "도쿄니치니치 신문"을 신창간하게 되었다.[11]

1949년 11월 27일, 마이니치 신문 도쿄 본사의 석간 신문인 "석간 마이니치 신문" 발행으로 경쟁이 심화되자,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오락물 중심으로 내용을 변경하였다. 고다 타모쓰(高田保)의 시사 에세이 "브라리 뵤우탄"(ブラリびょうたん) 기획이 호평을 받았다.[11]

1950년 3월부터 스포츠 닛폰(スポーツニッポン)이 도쿄에서 발행을 시작하면서 사업이 중복되었고, 1954년 9월 1일 조간 신문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스포츠 닛폰과의 경쟁에서 밀려 1955년 8월 31일 자로 사실상 통합되어 휴간되었다.[11]

도쿄니치니치 신문사는 편집국을 도쿄 유라쿠초(有楽町)의 마이니치 신관(毎日新館)에 두고, 인쇄는 마이니치 신문 도쿄 본사에 위탁했지만, 회사 조직 자체는 별개 회사였으며 자본 구성에 마이니치 신문사의 이름은 없었다. 이후 마이니치 신문사, 산 사진 신문사(サン写真新聞社), 스포츠 닛폰 신문사[11]와 함께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인쇄는 도쿄 미나토구(港区) 시바(芝)에 설립한 도쿄니치니치 신문 인쇄 공장(현재의 토니치 인쇄)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했다.[11]

신생 토니치(東日)의 지면은 대략 4면으로 구성되었다. 1면은 종합면(정치 경제)으로, 마이니치 신문 석간에 계승되는 "긴지 헨헨"(近事片々)도 게재되었다. 2면은 스포츠와 가정면으로, 마이니치 신문 주최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都市対抗野球大会)나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選抜高等学校野球大会), 프로 야구(プロ野球) 마이니치 오리온즈(毎日オリオンズ)(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즈(千葉ロッテマリーンズ)) 기사가 주로 실렸다. 3면은 사회면, 4면은 연예면으로 구성되었으며, 라디오 도쿄(ラジオ東京)(JOKR)(TBS 라디오(TBSラジオ))의 기사가 많이 실렸다.[11]

3. 연혁

1872년 3월 29일(구력 2월 21일) - '''도쿄니치니치 신문''' 창간. 도쿄 아사쿠사의 니포샤(日報社)에서 창간되었다.

1875년 - 일본 근대 신문 역사상 최초로 개별 배달을 시작하였다.

1876년 - 니포샤, '''중외상업신보'''(中外商業新報)의 인쇄 발행을 미쓰이물산(三井物産)으로부터 맡았다.

1877년(메이지 10년) - 태정관정원(太政官正院) 폐지에 따라 문서국(현재의 국립인쇄국)이 소멸. 이후 관보(官報) 창간까지 본지가 메이지 정부의 공식 발표를 게재하였다. 단, 본지 게재에 의해 새로운 법률, 칙령이 공포된 것으로 간주될 정도의 강한 권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1911년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社), 니포샤를 합병(『도쿄니치니치 신문』과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제호는 각각 변경하지 않음). 다이마이(大毎) 발행의 『마이니치덴포』(毎日電報)를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흡수(도쿄니치니치는 지문의 벚꽃 무늬나 「여록(余録)」란 등을 계승).

1926년(다이쇼 15년) 12월 25일 - 다이쇼(大正) 다음 연호를 「광문(光文)」으로 오보(광문사건).

1936년(쇼와 11년) 12월 25일 - 「지지신보(時事新報)」와 합병.[12]

1943년(쇼와 18년) 1월 1일 - 동서에서 달랐던 제호를 '''마이니치 신문'''으로 통일. 편집 기능을 도쿄에 집약 통합하였다.

1948년12월 4일 도쿄니치니치 신문사(東京日日新聞社)에서 석간으로 신창간.

1954년9월 1일 조간으로 전환.

4.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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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메이지 5년) 2월 21일 창간호부터 같은 해 3월 1일까지는 오른쪽 가로쓰기 전서체의 주머니 글씨체에 비운 무늬가 들어간 '''東亰日日新聞'''(「日日」은 주나문자로, 구부에 까마귀와 구부에 바를 정, 「新」도 異体字로 편이 「立+未」) 제호를 사용했다. 전서는 당시 서예의 명인이었던 겸당이 휘호한 것으로, 그 글씨의 비운 무늬를 낙합 기지로가 붙였다.

1872년 3월 2일부터 같은 해 6월 29일까지는 명조체의 오른쪽 가로쓰기로 「東京日日新聞」 제호를 사용했다. 1872년 7월 2일부터 1873년(메이지 6년) 2월 28일까지는 세로쓰기 해서체로 「東京日=新聞」(「=」는 반복 문자) 제호를 사용했다. 1873년 3월 2일부터 다음날 3일까지 이틀간은 해서체로 오른쪽 가로쓰기 「관허」 이하 세로쓰기로 「東京日=新聞」 제호를 사용했다.

1873년 3월 7일부터 6월 12일까지는 마찬가지로 오른쪽 가로쓰기 「관허」 이하 세로쓰기로 「東亰日=新聞」이지만, 서체가 예서체가 된다. (「新」의 편은 「立+未」) 1873년 6월 15일부터 1874년(메이지 7년) 6월 4일까지 오른쪽 가로쓰기 「관허」 이하 세로쓰기로 「東京日々新聞」이 되고, 서체가 명조체로 변경되었다.

1874년 6월 5일부터는 상부의 「許官」이 빠지고, 11월 30일까지 세로쓰기 명조체로 「東京日々新聞」 제호를 사용했다. 1874년 12월 2일 이후는 오른쪽 가로쓰기 필체로 「東亰日日新聞」(「新」의 편은 「立+未」) 제호를 사용했으며, 후쿠치 겐이치로가 휘호했다.

메이지 30년대 후반에 시기 불명이지만 세로쓰기가 되어 「東亰日日新聞」(문(聞)의 문부는 「门」) 제호를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후쿠치 겐이치로가 휘호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3월 1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경영으로 넘어가면서, 무지였던 바탕 무늬에 가로선과 벚꽃이 들어갔다. 이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이 도쿄에서 발행했던 『毎日電報』에서 계승한 것이다. (다이쇼 중기까지 「大阪毎日新聞社経営」「毎日電報合同」의 명조체 활자체가 오른쪽 어깨에 들어갔으며, 그 후 쇼와 초기 무렵에 시기 불명이지만 제호와 바탕 무늬가 일부 보정되었다.)

1936년(쇼와 11년) 12월 25일, 제호의 오른쪽 어깨에 세로쓰기로 「時事新報合同」의 글자가 들어갔다. 이듬해 12월 26일부터 제호 아래에 검은 바탕에 흰 바탕으로 오른쪽 가로쓰기로 『時事新報』의 제호가 작게 들어가고, 그 아래에 오른쪽 가로쓰기 고딕체 활자로 「合同」이라고 적히게 되었다.

석간 도쿄 니치니치 신문의 제호와 바탕 무늬는 현재의 마이니치 신문 시대의 것(1911년 3월 1일부터 1942년 12월 31일까지 사용)과 동일한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5. 사기와 사장

도쿄니치니치 신문의 사기(社旗)는 도쿄닛폰신문(東京日日新聞)의 “東”자를 육망성으로 형상화하고, 그 중앙에 “京”자를 백색으로 빼낸 형태에 “日日”자를 원형으로 배치한 마크(社章)를 중심으로, 붉은색 두 줄의 띠를 배경으로 한 디자인이었다.

6. 발행소의 변천

1872년 2월 21일, 도쿄부 아사쿠사 카야초 1정목 24번지(창업자 중 한 명인 조노 덴페이(条野伝平) 자택, 현재의 도쿄도 다이토구(台東区) 야나기바시(柳橋) 1정목 13번지)에서 창간되었다. 이후 1872년 3월 12일에는 도쿄부 니혼바시 모토오사카초 신도(현재의 도쿄도 추오구(中央区) 니혼바시닌교초(日本橋人形町) 1정목 북부)로 이전하였다.

1873년 2월 25일, 도쿄부 아사쿠사 가와라초 16번지(창업자 중 한 명인 니시다 덴스케(西田伝助) 자택: 현재의 도쿄도 다이토구 야나기바시 1정목 23번지)로 이전하였다. 이 옛터는 와콜(ワコール) 아사쿠사바시 빌딩이 되어, 미쓰비시 UFJ은행(三菱UFJ銀行) 아사쿠사바시 지점과 루시앙(ルシアン) 도쿄점이 입주해 있다.

1874년 5월 11일, 도쿄부 긴자(銀座) 2정목 3번지(현재의 추오구 긴자 2정목 6번지)로 이전하였으며, 이 옛터는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취득하여 오쿠라 본관이 되었다. 1876년 12월 31일에는 도쿄부 오와리초 1정목 1번지(현재의 추오구 긴자 5정목 1번지)로 이전하였는데, 이 옛터는 나카무라 시즈오(中村静尾)의 나카무라 세키젠카이(中村積善会)가 취득하여 메이테쓰(名古屋鉄道)에 임대, 멜사(メルサ) (뉴멜사→EXITMELSA)가 되었다.

1878년 11월 2일 구제 시행으로 도쿄부 교바시구(京橋区) 오와리초 1정목 1번지가 되었고, 1889년 5월 1일 시제 시행으로 도쿄부 도쿄시 교바시구 오와리초 1정목 1번지가 되었다.

1909년 3월 31일,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麹町区) 유라쿠초(有楽町) 1정목 2번지로 이전하였다. 1943년 7월 1일 도제 시행으로 도쿄도 고지마치구 유라쿠초 1정목 2번지가 되었다. 1965년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의 팰리스사이드 빌딩(パレスサイドビルディング)으로 이전함에 따라 미쓰비시 지소(三菱地所)에 매각되었고, 유라쿠초 빌딩(有楽町ビルヂング)과 함께 재건축되어 신유라쿠초 빌딩(新有楽町ビルヂング)이 되었다.

7. 주요 사업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다양한 주요 사업들을 주최하거나 관여했다.


  • 전일본바둑선수권대회 → 본인방전: 1939년 학예부장 아베 신노스케가 발안하고, 부부장 쿠로사키 사다지로가 주도하여 창설되었다. 다이마이 본사와 공동 주최했다.
  • 명인전 (장기): 아베 신노스케가 발안하여 1935년에 창설되었다. 도쿄니치니치 신문이 주최하던 시대에는 순위전이 없었고, 도전자 결정 리그전이 실시되었다. 순위전은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를 맡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
  • 도시대항야구대회: 1927년 운동부 시마자키 신타로와 하시도 신이 주도하여 창설했다.
  • 도쿄 올드보이즈 테니스 대회 (현재의 마이니치 테니스 선수권 대회): 1919년 운동부장 유미다테 코와니가 발안·주도하여 창설했다.
  • 동일천문관
  • 일본음악콩쿠르: 구 지지신보(時事新報)로부터 계승했다.
  • 대일본상투 우승액 게시: 구 지지신보로부터 계승했다.
  • 도쿄 니치니치 매거진: 일요 부록으로, 주간지의 효시이다. 단, 발간 당시 다이마이 본사 주도로 선데이 마이니치가 창간되었다.

8. 저명한 인물

도쿄니치니치 신문과 관련된 주요 인물에 대한 내용은 매일신문사#출신자・관계자 문서를 참고.

9. 중일 전쟁 보도 논란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중일 전쟁 당시 "백인 살해 경쟁"이라는 전시 기록을 보도하여 논란이 되었다.

10. 한국과의 관계

10. 1. 일제강점기 조선 관련 보도

10. 2. 해방 이후의 논조 변화

참조

[1] location
[2] location
[3] book 内閣印刷局七十年史 内閣印刷局 1943
[4] news 内相と警視総監の辞職を勧告 東京朝日新聞 1928-05-01
[5] news 貴族院本会議で緊急質問 東京日日新聞 1928-05-02
[6] news 衆院予算総会でも政府を追及 中外商業新報 1928-05-02
[7] news 有田所署長は引責辞職 東京日日新聞 1928-05-18
[8] description
[9] book 日米開戦をスクープした男 新人物往来社 2009
[10] description
[11] description
[12]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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